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건강정보

양배추와의 불편한 동거 - 가스 문제의 진실

by 한끼집밥 2024. 11. 7.





양배추는 참 괜찮은 채소다. 영양가도 높고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나쁘지 않다. 비타민 C는 오렌지보다도 많고, 항산화 물질도 풍부하다. 특히 요즘 화제가 되는 설포라판이라는 성분은 암 예방에도 좋다고 해서 다이어트할 때 찌개에 넣어 먹으면 포만감도 좋고 칼로리도 낮아서 자주 사다 먹곤 했다. 그런데 이상하게 먹고 나면 배에서 콸콸 소리가 나더니 알 수 없는 가스가 차오르기 시작했다. 처음엔 단순히 소화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양배추만 먹으면 어김없이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.

찾아보니 양배추에는 라피노스라는 올리고당이 들어있다고 한다. 우리 몸은 이걸 소화하지 못해서 대장 속 세균들이 열심히 분해하다 보니 수소 가스가 발생하는 것. 더 자세히 들어가보면 우리 장내 미생물들이 이 라피노스를 만나면 마치 잔치를 벌이듯 열심히 발효를 시작한다. 그 과정에서 수소, 이산화탄소, 메탄 등 각종 가스들이 생성되는데, 이게 바로 우리를 괴롭히는 주범이다. 그래서 아무리 씹어도 소용이 없었던 거다. 이게 무슨 진화의 장난인지 모르겠다. 건강에 좋다고 열심히 먹었더니 옆 사람들이 다 도망가게 생겼다.

사실 더 재미있는 건, 이런 현상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. 어떤 사람은 별 문제가 없는데, 어떤 사람은 조그마한 양배추 조각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. 이건 우리 각자가 가진 장내 세균총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. 마치 각자의 장에 살고 있는 미생물들이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. 내 장 속 세균들은 아주 열정적인 파티광인 모양이다.

그나마 다행인 건 양배추를 삶으면 이런 현상이 덜하다는 것. 아마도 열을 가하면서 라피노스가 일부 파괴되는 모양이다. 섭씨 70도 이상에서 조리하면 이 당들이 분해되기 시작한다고 한다. 하지만 날것으로 먹을 때가 설포라판이나 비타민 C 같은 영양소가 더 풍부하다고 하니 이것도 참 난감하다. 게다가 유산균 증식을 돕는 프리바이오틱스 효과도 날것이 더 좋다고 한다. 결국 나는 혼자 있을 때만 날것으로 먹기로 했다.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준의 사회적 고립은 감수해야지.

사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 양배추만이 아니다. 브로콜리, 방울양배추, 케일 같은 십자화과 채소들은 다 친척이라 그런지 비슷한 효과를 보여준다. 과학자들은 이런 채소들이 왜 이런 성분을 가지게 됐는지 연구했는데, 재미있게도 이게 식물의 자기방어 메커니즘이라고 한다. 해충이나 균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달시킨 물질들이 우리 장내 세균들의 파티 음식이 된 셈이다.




최근에는 이런 가스 발생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들도 나오고 있다. 장내 미생물들이 이런 발효 과정을 통해 만들어내는 단쇄지방산은 오히려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. 그러니까 방귀가 많이 나온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. 물론 이걸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겠지만.

어쩌면 이건 채소들의 작은 복수일지도 모르겠다. 우리가 그들을 너무 함부로 대했나? 아니면 건강에 좋은 걸 먹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일까? 그래도 난 포기할 수 없다. 다만 이제는 좀 더 현명한 전략이 필요하다.

인간과 채소의 이런 미묘한 관계를 보면 자연의 신비로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. 그리고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화학반응들을 생각하면, 인체는 정말 놀라운 실험실이 아닐 수 없다. 다만 이 실험의 부작용이 조금 민망한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. 하지만 뭐 어떤가. 건강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은 해프닝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.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엘리베이터에서는 양배추를 먹은 지 2시간 이내에는 타지 말아야겠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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